<파수꾼> 하퍼 리 문학비평

2015년 출간된 <파수꾼>은 평생 <앵무새 죽이기> 단 한 편의 소설만을 쓴 것으로 알려졌던 하퍼 리의 신작으로 전세계적인 주목을 끌었다. 하퍼 리는 <앵무새 죽이기>를 쓰기 전 먼저 <파수꾼>을 썼으나 출판사의 권유로 내용성 <파수꾼>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앵무새 죽이기>로 고쳐 써 1960년에 출판한다. <앵무새 죽이기>가 퓰리처상을 수상하며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저자인 하퍼 리는 더이상 신작을 내지 못하였다.

그러다 작년에 55년만에 속편인 <파수꾼>이 출판되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하퍼 리의 금고 속에 있던 <파수꾼>은 그녀의 변호사 토냐 카터가 동의를 얻어 출판하게 되었는데, 당시 90세인 하퍼 리가 치매에 걸려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변호사가 멋대로 출판했다는 의혹이 일각에서 일었던 것이다. 많은 독자들은 <앵무새 죽이기>와 비교하며 <파수꾼>을 출판되지 않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앵무새 죽이기>와 비교하며 <파수꾼>을 폄하하는 독자들 중 상당한 사람들은 <앵무새 죽이기>에서 불의에 맞서 당당하게 흑인을 변호하며 주인공 스카웃에게 롤모델이 되었던 애티커스가 <파수꾼>에서 흑인인권운동에 대해 반발하는 인물로 그려진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파수꾼>의 독자들 대부분에게 <앵무새 죽이기>의 주인공이 뿌리깊이 각인되어 있기에, <파수꾼>을 읽고 나서는 "나의 애티커스는 이렇지 않아!"라고 외치고 마는 것이다.

<앵무새 죽이기>가 1930년대, 주인공 스카웃(진 루이스 핀치)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의 이야기인데, <파수꾼>은 1950년대 흑인인권운동이 남부를 떠들썩하게 만들 때, 성인이 된 스카웃이 뉴욕에서 고향 메이콤에 귀환하면서 겪는 이야기다. 진 루이스는 가족과 친지들이 모두 흑인인권운동에 반발하는 꽉 막힌 태도를 보이자 충격을 받게 된다. 특히나 옛날 흑인 청년의 무죄를 법정에서 열성적으로 변론했던 아버지 애티커스가 인종차별주의자들과 함께 집회를 벌이는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애티커스가 흑인들에 대한 편견을 이야기하는 부분을 보면 이해가 간다.

"얘야, 스카웃, 너는 네 생각에 잘못된 무언가를 하는 나를 보고 마음이 상해 있구나. (중략) 지금까지 내 경험으로는 말이야, 백인은 백인이고 흑인은 흑인이야. 지금까지 그렇지 않다고 나를 설득시킨 주장을 들어 본 적이 없어. (중략)
자, 이걸 생각해 봐. 남부의 모든 니그로들에게 갑자기 완전한 시민의 평등권이 주어지면 어떻게 될까? (중략) 그렇지, 월러비는 사기꾼이야. 우리도 그걸 알아. 하지만 월러비만큼이라도 일을 아는 니그롤르 너는 한 명이라도 알고 있어? 그렇게 되면 아마도 지보가 메이콤 읍장이 되겠지. 너는 지보 정도의 능력을 가진 누가 읍의 재정을 관리하면 좋겠어? 우리는 수적으로 열세에 있거든." (351, 352)

확실히 <앵무새 죽이기>와 비교하면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떨어진다고 할 수밖에 없다. <앵무새 죽이기>는 때묻지 않은 초등학생 소녀 스카웃의 시선을 통해 남부의 인종차별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영리함이 돋보인다. 또한 애티커스 변호사가 누명을 쓴 흑인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법정이라는 매력적인 무대를 활용하여, 애티커스 변호사의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담론을 잘 드러냈다. 반면에 <파수꾼>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부분은 주인공 진 루이스와 아버지 애티커스의 말싸움이라는 방식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주장과 사상이 따옴표 속의 대사로 직접적으로 표현되다보다시피 하다 보니 등장인물들이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작가의 복화술 인형으로 만들어버리는 우를 범하고 만다. 화자가 심정적으로 진 루이스의 주장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다보니 소설이 소설로서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프로파간다 소설의 느낌이 나고 만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아빠는 예수님이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뿐이에요. 아빠 생각에 대다수이 유익을 위한 목적이 정당하다는 걸 보이기 위해 아빠는 끔찍한 수단을 동원하고 있어요. 그 목적은 아마도 옳을 거예요. 저도 똑같은목적을 믿는 것 같아요. 하지만 사람들을 볼모로 사용해선 안 돼요, 아빠. 그래선 안 돼요. 히틀러와 러시아의 그 패거리는 자기들 나라를 위해서는 뭔가 근사한 일들을 했다고 하지만 그러면서 수엇이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잖아요." (359,360)

소설의 절정 부분에서 이런 문답이 20페이지 이상 계속되다보니 질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렇게 치열한 논쟁을 벌이던 두 사람이 결말부에서 급작스럽게 화해하는 장면 또한 당황스럽다. 굳이 화해의 계기를 따지자면 진 루이스가 삼촌에게 맞고 정신을 차린 것뿐인데, 독자로서는 당황스럽다.

이처럼 저자의 첫 작품답게 거친 부분도 많지만, 나는 이 소설이 싫지는 않다.

일단 논란이 된 애티커스의 '변절'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만약 애티커스가 <앵무새 죽이기>에서 나왔던 그대로 흑인들의 인권을 거침없이 저지하는 정의의 사도였다면 이 소설 자체가 성립하지 못했을 것이다. <파수꾼>은 뉴욕이라는 개방적 공간에서 살다가 남부의 폐쇄적 공간으로 귀향한 진 루이스가 자신이 믿었던 가족과 친지들, 특히 어린 시절 자신의 모든 것이었고 삶의 나침반과도 같았던 아버지와 갈등을 겪는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예전에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지금은 새누리당에 활약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듯이, 애티커스와 같은 경우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1930년대에는 흑인 청년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양심과 신념을 걸고 싸웠지만, 1950년대에 민권운동이 일어나고 흑인들이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게 되자 위기감을 느껴 반동적 행동에 나설 수도 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깊이있는 인간관을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앵무새 죽이기>가 그랬듯이 단순한 선악이분법을 거부하고, 삼촌이나 아버지가 인종적 편견은 가지고 있을지언정 절대악으로 그려지지 않으며 소설 마지막에는 화해한다. 삼촌인 핀치 박사가 진 루이스에게 "이로써 이 세상에 정의란 없다는 것을 알겠지"(383)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도 드러난다.

무엇보다 이 소설이 가진 장점은 <앵무새 죽이기>에 나왔던 메이콤이라는 미국 남부의 전형적인 도시를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앵무새 죽이기>에 나왔던 세계관을 완성시켰다는 점이다. 말괄량이 소녀였던 '스카웃'이 진 루이스로 성장하여 고향에 돌아와 겪는 갈등은 남부에 흐르는 시간의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여자가 바지를 입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고, 흑인들이 백인과 동등한 인권을 가지지 못했던 1950년대의 미국 남부, 그 독특하고도 매력적인 세계를 경험하고 싶다면 <앵무새 죽이기>와 <파수꾼>은 같이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하퍼 리가 별세하기 1년 전에 이 책이 출간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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